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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칼럼] 한글날 제정 100주년의 해, 신조어 ‘좌아하게’를 생각한다

더뉴스코리아 | 기사입력 2026/10/07 [10:40]

[이상규 칼럼] 한글날 제정 100주년의 해, 신조어 ‘좌아하게’를 생각한다

더뉴스코리아 | 입력 : 2026/10/07 [10:40]

▲ 이상규 경북대명예교수   ©더뉴스코리아

어제 하루 종일 ‘좌아하게’라는 말이 매스컴과 인터넷을 달구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월 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X에 “많이들 함께 해주세요. 좌아하게 말입니다”라는 글을 남긴 것이 발단이었다.

 

‘우아하게’의 ‘우’를 ‘좌’로 바꾸어 만든 말로, 본래 미적 감각과 태도를 나타내던 ‘우아하다’에 정치적 좌우의 의미를 덧붙인 신조어다.

 

우아하게’의 ‘우’를 한자 ‘右’(우파, 보수)로 풀이하고, 右 대신에 ‘左’(좌파, 진보)를 대치한 것으로 우아하다라는 미적 근거에 대응되는 좌측 성향의 이념적 우수함을 대치시키는 한 단어를 두 계열로 쪼갠 신조어다. 

 

‘좌아하게’라는 말은 이 대통령의 강성 지지층 사이에서 뼈를 때리는 듯이 단어 하나로 모든 이념적 변이형을 하나로 뚱치는 매우 효과가 나는 프로파간다 전략이다. 이 신조어를 10월 1일 대통령 자신의 소셜미디어 X에 “많이들 함께 해주세요. 좌아하게 말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것도 10월 한글날 제정 100주년의 뜻 깊은 달에 험준한 산능성을 오르고 있는 한국어의 수난을 상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메시지는 즉각 험한 말들이 등장하는 정치적 논란을 빚었다. 두 진영으로 갈라진 말싸움은 꼬리를 물고 '좌아하게’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심지어는 ‘우리나라→좌리나라’, ‘좌지우지→좌지좌지’, ‘우물 안 개구리→좌물 안 개구리’,  대통령이 하루에 10개가 넘게 폭풍 트윗을 해, 참모들의 ‘우려가 크다→‘좌려’(우려)가 크다‘는 식으로 분열과 대립이 각을 세우고 있다. ‘우아하게’란 아름다운 말까지 이념적으로 비틀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새로운 말은 막을 수 없고 막을 필요도 없다.

 

이 말은 곧바로 온라인에서 다양한 말놀이로 변주됐다. 하나의 단어가 짧은 시간 안에 정치적 의미를 얻고, 풍자와 패러디의 언어로 번지는 모습은 오늘날 한국어가 얼마나 빠르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좌아하게’라는 말 자체의 정치적 의미가 아니다. 그 한 단어를 계기로 오늘날 우리말의 변화와 그 변화의 속도를 생각해보게 된다. 

 

단어가 문화적 통화라는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문화자본 형태에 관한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언어는 사회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새로 만들어 지는 단어의 품격이나 가치가 문화자본으로 축적된다. 우리가 만들어내거나 선택하는 단어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타인의 정체성과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사용한 ’좌아하게‘라는 단어가 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우리의 단어 선택은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그룹을 드러내는 보이지 않는 지표일 수 있다. 언어를 통해 분열이 가속된다면 참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올해는 한글날 제정 100주년이다. 1926년 ‘가갸날’에서 시작된 한글날은 올해로 한 세기를 맞았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의 언어 환경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사람은 공간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한다. 그런데 공간의 변화가 빨라지면서 그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도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어제의 거리가 오늘 다르고, 오늘의 거리가 내일 또 달라진다. 새로운 산업과 직업이 생기고, 새로운 플랫폼과 관계가 등장하면서 그에 맞는 새로운 말들이 쏟아진다. 좋게 말하면 생동감이 넘치는 사회다. 하지만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정상적인 사유와 소통조차 쉽지 않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 [이상규 칼럼]한글날 제정 100주년의 해, 신조어 ‘좌아하게’를 생각한다  © 더뉴스코리아


특히 세대 간 언어의 간격이 그렇다. 젊은 세대에게는 익숙한 신조어가 다른 세대에게는 암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얼죽아’나 ‘중꺾마’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런 말들이 젊은 세대에게 재치 있는 언어유희라면, 그 말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대화에 참여하기 위한 작은 장벽이 된다.

 

문제는 새로운 말이 생겨나는 데 있지 않다. 언어는 원래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언어의 변화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면서 한 세대의 언어가 다른 세대에게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가 되는 데 있다. 언어는 사람을 연결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언어가 사람을 구별하고 배제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신조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요즘 명함을 받아도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한눈에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애널리스트, 퍼실리테이터, 헤드헌터, 크리에이터, 컨설턴트 같은 직함이 넘쳐난다. 새로운 직업이 생기면서 새로운 이름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때로는 이름이 실제 업무를 설명하기보다 사람의 지위와 이미지를 포장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발사는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작가는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며, 편집자는 에디터, 감독은 디렉터가 된다. 커피를 만드는 사람은 바리스타가 되고 꽃집 주인은 플로리스트가 된다.

 

외래어를 쓰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대방이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이기에 앞서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서로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현실을 설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포장하는 것인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인플루언서’와 같은 표현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생겨난 새로운 역할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말이지만, 그 말 역시 사회적 영향력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말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구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변화는 단순한 유행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부르는가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우리말을 돌아보면 이 사실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괴나리봇짐, 책보, 보퉁이, 보자기, 걸망, 바랑, 망태기, 소쿠리 같은 말은 이제 일상에서 듣기 어려워졌다. 그 자리를 에코백, 백팩, 쇼핑백, 파우치, 캐리어 같은 새로운 말들이 채우고 있다. 꽃 이름도 마찬가지다. 채송화, 봉선화, 할미꽃 같은 이름에는 그것을 보고 부르며 살아온 사람들의 생활과 기억이 들어 있다.

 

▲ [이상규 칼럼]한글날 제정 100주년의 해, 신조어 ‘좌아하게’를 생각한다  © 더뉴스코리아


단어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사전에서 낱말 하나가 없어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단어와 함께 존재했던 생활세계의 일부가 우리의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는 생태계와 닮았다.자연 생태계에 다양한 종이 함께 살아가듯 언어에도 표준어와 방언, 생활어와 전문어, 오래된 말과 새로 생겨난 말이 함께 존재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모두 밀어내면 언어의 생태계는 오히려 빈약해진다.

 

우리말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외래어나 신조어를 배척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말을 무조건 환영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말들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특히 방언은 표준어의 잘못된 형태가 아니다. 한 지역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삶의 언어다. 그 안에는 지역의 역사와 생활방식, 정서가 담겨 있다. 표준어가 전국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하다면 방언은 우리말의 다양성을 지켜주는 자산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문자가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고,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뜻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훈민정음 창제의 중요한 정신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설 앞에 서 있다. 문자를 몰라서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알아도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새로운 의미를 몰라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한글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어의 변화를 억누르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젊은 세대가 사용하는 새로운 말을 기성세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기성세대가 간직해온 오래된 말을 젊은 세대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서로 다른 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좌아하게’라는 말도 하나의 작은 사례다.

 

정치적 말장난으로 지나갈 수도 있고, 한때의 유행어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은 오늘날 한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나의 낱말이 순식간에 새로운 의미를 얻고, 사람들의 관계와 감정, 정치적 입장까지 표현하는 기호가 된다.

 

언어는 그렇게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말이 사람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가르는 수단이 될 때 우리는 한번 멈추어 생각해야 한다. 언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따지기 전에, 그 언어가 누구에게 열려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가. 다른 세대도 이해할 수 있는가. 그 말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말이 가리키는 현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가.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한글이라는 문자만이 아니다. 한글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정신까지 함께 되새겨야 한다. 언어를 통한 사회 분열이 가속되는 일은 참 심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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