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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칼럼] 일본의 자존심과 한일병합

김두용 기자 | 기사입력 2019/09/27 [14:02]

[지만원 칼럼] 일본의 자존심과 한일병합

김두용 기자 | 입력 : 2019/09/27 [14:02]

일본의 자존심과 한일병합

 

 

▲ 지만원 박사     ©더뉴스코리아

일본은 왜 아시아를 통합하려 했었나? 미국과 유럽 제국의 자원쟁탈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 일반론적 견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정신적 차원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일본의 개혁적 철학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835~1901을 산 사람이다. 66세에 타계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일본 회폐의 최고액 화폐인 1만 엔 권에 초상이 실린 일본 위인이다. 그는 산케이신문의 전신인 지지신보창립자이고 오늘의 게이오 대학 전신인 게이오 의숙을 세운 인물이다.

 

나는 내가 저술한 뚝심무지개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것은 인간 지만원 혼자 그런 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국으로 하여금 그 어느 누구도 가려하지 않는 험난한 길을 가지고 주창했다. 그런 주창이 일본 사회에 먹혀들었던 것은 그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실용적인 대학자였기 때문이었다. 일본 사회가 그의 말을 존중했던 것은 일본인 일반이 학문적 질서실력의 질서에 순종하는 문명인으로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명화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한 단계 발전한 이론을 내놓으면 거의 모두가 순종한다. 하지만 문명화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아래도 없고 위도 없다. 오로지 권력과 폭력의 노예들일 뿐이다. 이조 500년 동안 90%의 조선인들이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이런 노예근성은 이미 유전자로 고착돼 있고 후손들인 조선인 일반도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인 일반은 당시 가장 선구자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를 따랐고,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목표로 하여 합심해 달렸다. 그보다 6살 아래인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종이 되겠다 선언했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등 구한말 개화파들로부터 추종을 받았다. 1984111일부터 현재까지 엔화 1만 엔 권에 초상이 실려 왔다. 세뱃돈으로 유키치 세 장, 하는 식으로 1만 엔 지폐를 대신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다. 2024년 발행될 예정인 미래의 10,000엔 지폐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교체되기로 결정돼 있다. 새로 등장하는 인물은 일본식 자본주의를 몸소 실천한 표상의 인물이라 한다.

 

1882년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생들이 파견되었다. 유키치는 조선인 유학생 유길준, 박영효, 윤치호 등을 자주 만나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들이 귀국한 뒤에도 유키치는 꾸준히 연락을 유지했다. 독립신문 등 신문과 언론에 종사하던 윤치호에 대해서는 언론 경영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 주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혹독한 형벌과 연좌제를 보고 유키치는 비분강개하여 당일 하루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그는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며 대성통곡했다. 이어 조선독립당의 처형(朝鮮独立党処刑)이라는 글을 발표하는 등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며 조선의 야만을 온 일본 사회에 전파했다. 그 다음으로 그는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일본이 주축으로 아시아를 이끌어야한다는 탈아입구론(脱亜入欧,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이었다. 그의 이 지침은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정한론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가 바로 1910년의 한일병합이었다 한다. 조선이 망할 짓을 한 것이다.

 

탈아입구론 (1885) 원문 해석

 

"서구화의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은 홍역과 같지만,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홍역보다는 이롭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명에 거역할 수 없으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도쿠가와 막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脫亞)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한국과 중국)는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중국과 일본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 열강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서구인들은 언제나 일본, 중국, 한국을 같은 문화를 가진 비슷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일본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  『時事新報1885明治1816

 

탈아입구론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 ‘아시아에는 크게 일본, 중국, 조선이라는 세 개 나라가 있는데 일본만 발전해 있고 중국과 조선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미개하다. 이 세 개의 나라 중에서 오로지 일본만이 서구수준으로 발달해 있다. 그런데 세계는 단지 일본이 아시아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일본을 무시한다. 그런데 조선 당국(민비족)이 문호를 개방하자고 주장하는 똑똑한 인재들을 연좌제까지 걸어 숙청했다. 조선에 대한공분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이 나아갈 길이라는 논리를 개발했다. 일본의 자존심을 서구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일본은 병신 같은 조선과 중국을 때려서라도 개화시키고 문명화 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존중하는 일본인들은 당시 일본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제시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를 위해 나선 지휘자가 바로 이토 히루부미였다.

 

훈민정음은 [세종], 한글의 아버지는 [후쿠자와 유키치]

 

우리국민에게는 그를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놓을 의무가 있다. 세종은 1445년 훈민정음을 내놓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길준(1856~1914)이라는 제자에게 그가 연구해낸 [한글]을 지도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우리가 사용하는 실용문자는 아마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글 띄어쓰기 주도한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라 영국 목사 존 로스(John Ross)였다. 그리고 사용할 수 없었던 훈민정음을 지금의 문자시스템으로 연구한 사람 역시 조선사람이 아니라 일본사람이었다. 유키치의 학습을 받아 1895년 유길준이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한글] 작품이 [서유견문]이었다

 

 

훈민정음은 [세종], 한글의 아버지는 [후쿠자와 유키치]

 

 

 

훈민정음은 당시 조선인의 언어를 표현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떼어 쓰기도 안 됐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을 영국의 목사와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던 학자 유키치에 의해 실용화되었다. 실용화의 효시가 유길준이 유키치의 학습을 받아 1895년 세상에 내놓은 [서유견문]이었다. 우리에게 지금 사용하고 있는 표현용 단어들을 만들어 준 사람은 조선 사람이 아니라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한 연구에 의하면 현재 우리가 현재 사용 중인 한자 단어의 70%, 우리가 쓰는 한국어단어의 50%가 유키치 책상 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나머지는 유키치 제자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학교, 시간, 경제.`문화, 문명, 사상, 연설, 계급, 법률, 자본, 토론, 종교, 이성, 철학, 감성, 주관, 의식, 과학, 물리, 화학, 분자, 원자, 질량, 공간, 이론, 문학, 미술, 비극,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런 단어를 새로 만들어 준 사람이 유키치다. 우리가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영한사전을 찾아서 영어단어를 외우듯이 우리가 지금 현재 쓰는 단어는 세종이 만든 것도 아니고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유키치가 만들어 준 것이다. 세종 시대의 집현전 학자들은 중국에 매몰돼 있는데다 자기들이 느끼는 희귀가치 즉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키치 이전에는 한문만 사용했다. 유키치 이전에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학교라 했다. 다리를 라 했고, 가르치는 것을 라 했고, 상대방과의 교류하는 것을 라 했다. 이는 글자였지 의사를 교환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스승은 교를 건너 교에 가서 교하고 하루 종일 교한 학생들은 밤늦도록 교했다고 쓰거나 말하면 누두도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말은 한문을 배운 소수의 양반들끼리만 종이와 붓을 통해 그들의 의사를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키치는 조선말 단어사전을 만들어 냈고, 유길준과 주시경(1876~1914)이 이를 이어받아 실용화하고 체계화하고 전파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언문이다, 암클이다 천시 받던 훈민정음이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한글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은 그 동안 반일적인 사회적 정서에 묻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조선인들과 그 후예들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존재였음을 우리는 늦게라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019.9.27.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뉴스코리아>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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